
어머님이 더 이상 내가 알던 어머님이 아니었던 날
26년이라는 세월을 같은 집에서 보내면 며느리도 그냥 며느리가 아니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어머님 방문을 열고 "어머님 주무셨어요?" 인사하는 일이, 우리집에서는 26년째 이어진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남편과 세 아이와 함께 살아온 시간, 그 안에 늘 어머님이 계셨고 어머님의 자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치매 진단을 받으신 지 12년쯤 되던 어느 무렵부터, 제가 알던 어머님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방문을 쾅 닫으시고, 별것도 아닌 일에 큰 소리를 내시고, 손주들에게 갑자기 화를 내시는 모습. 처음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신가 보다" 하고 넘겼는데, 그런 날이 점점 잦아졌습니다.
밥상을 엎으려 하시거나, 약을 안 드시겠다고 약봉지를 던지시거나, 한밤중에 깨서 누구에게 소리치시는 일이 반복됐어요. 저 혼자 부엌에 서서 가만히 울었던 날이 많았습니다. 어머님이 미운 게 아니라, 이게 어머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더 슬펐던 거예요.
동국대병원 진단, 그리고 동네 의원에서 받던 치매약
처음 어머님이 이상하다 싶었던 건 12년 전이었습니다.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하시고, 가스불 끄는 걸 잊어버리시고, 외출하셨다가 길을 헷갈려 하셨어요.
남편과 상의해서 큰 병원에서 정확히 검사를 받자고 결정했고, 동국대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날의 그 진료실 풍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알츠하이머형 치매가 맞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머님은 의외로 담담하셨고 우리 가족이 더 무너졌어요.
이후 처방은 집 근처 동네 의원에서 받았습니다. 큰 병원까지 매번 가는 게 어머님께도 부담이고, 동네 의사 선생님이 잘 봐주셨거든요. 치매약은 그곳에서 꾸준히 받아왔습니다.
처음 몇 년은 약을 잘 드시고, 일상도 어느 정도 유지가 됐어요. 그런데 진단 10년차쯤 넘어서면서, 약은 그대로인데 어머님의 감정 기복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치매약만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의 폭풍'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 가족요양으로 어머님을 케어하기 시작한 뒤로, 저는 어머님을 종일 곁에서 지켜보게 됐어요.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치매는 단순히 기억만 잃는 병이 아니라, 감정과 행동이 함께 변하는 병이라는 것.
전문 용어로는 '행동심리증상(BPSD)'이라고 하더라고요. 망상, 환각, 공격성, 우울, 불안, 수면장애 같은 증상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머님도 점점 이 부분이 심해지셨습니다.
- 며느리인 저를 도둑이라고 의심하시는 망상
- 한밤중에 일어나 거실을 돌아다니시는 불면
-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폭발하는 분노
- 손주들에게 거친 말을 내뱉으시는 모습
치매약은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이런 감정과 행동 문제까지 모두 해결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저는 그때야 알았습니다.
동네 의원 선생님도 "이건 정신과적인 접근이 필요할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씀해 주셨어요.
금촌 컴포트 정신의학과로 발걸음을 옮기기까지
솔직히 말하면, '정신과'라는 단어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어머님 세대분들은 정신과에 가는 것 자체를 굉장히 꺼리시고, 가족들도 "치매면 그냥 치매과(신경과)로 가야지, 왜 정신과를 가?"라는 시선이 있거든요.
하지만 그 시점의 저는 절박했어요. 어머님이 화를 내실 때마다 어머님 본인도 너무 힘들어 보이셨고, 그 화가 지나가고 나면 또 죄책감에 더 우울해하셨거든요. 이건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알아보다가 알게 된 곳이 금촌에 있는 컴포트 정신의학과였습니다. 노인 환자, 특히 치매 환자의 행동심리증상을 함께 봐주시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처음 진료 가던 날, 어머님은 차 안에서 또 한 번 짜증을 내셨습니다. "내가 미쳤냐, 정신과를 왜 가느냐"고요. 저는 그날 어머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어머님, 미쳐서 가는 게 아니에요. 어머님이 요즘 너무 힘드시니까, 마음 좀 편하게 해주는 약 받으러 가는 거예요."
다행히 진료실에 들어가신 어머님은 의외로 차분하게 의사 선생님 질문에 답하셨고, 저는 옆에서 그동안의 변화를 차근차근 설명드렸습니다.
약을 바꾸고 한 달, 어머님의 일상이 달라졌습니다
컴포트 정신의학과에서는 어머님의 상태를 자세히 보시고, 기존 치매약에 더해 감정 조절과 수면, 망상 증상에 도움이 되는 정신과 계열의 약을 함께 처방해주셨어요. 용량도 노인분들에게 맞게 아주 조심스럽게 시작했습니다.
처음 일주일은 큰 변화가 없는 듯했어요. 그런데 2주차쯤부터, 저희 가족 모두가 느낄 만큼 어머님이 달라지셨습니다.
달라진 점들
- 아침에 일어나시는 시간이 일정해졌어요.
- 한밤중에 일어나 돌아다니시는 일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 며느리인 저를 의심하시는 말이 눈에 띄게 줄었어요.
- 손주들에게 다시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며 웃어주십니다.
- 화가 나도 예전처럼 폭발하지 않고, 짜증 정도로 가라앉으세요.
- 무엇보다, 어머님 본인이 편안해 보이세요.
어머님이 거실 소파에 앉아 햇볕을 쬐며 조용히 음악을 들으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곤 했습니다. "아, 어머님이 이제 좀 쉬시는구나" 싶어서요.
같은 고민을 하는 보호자분들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
저처럼 치매 가족을 돌보시는 분들 중에, '치매약은 꾸준히 드시는데 왜 자꾸 감정이 더 격해지지?' 하고 답답해하시는 분이 분명 계실 거예요. 제 경험을 정리해드리면 이렇습니다.
1. 치매약과 정신과 약은 '역할'이 다릅니다
치매약은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는 약이고, 정신과 약은 그로 인해 생기는 감정·행동 문제를 다스리는 약이에요. 한쪽만으로 부족하다면, 두 가지를 함께 고려해볼 수 있습니다.
2. 신경과·동네 의원 선생님과 솔직하게 상담하세요
"요즘 어머님이 너무 자주 화를 내세요", "밤에 안 주무세요" 같은 일상 변화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세요. 정신과 진료가 필요한 시점인지 알려주십니다.
3. 정신과는 '낙인'이 아니라 '도움'입니다
특히 노인 정신과(노년기 정신건강의학과)는 치매 환자의 행동심리증상을 전문적으로 봐주시는 분들이에요. 어르신께는 "마음 편해지는 약 받으러 가자"라고 자연스럽게 말씀드리는 게 도움이 됩니다.
4. 약을 바꾼 뒤에는 보호자가 꼼꼼히 기록하세요
수면 시간, 화내는 빈도, 식사량, 표정 변화 등을 일기처럼 적어두세요. 다음 진료 때 의사 선생님께 그대로 보여드리면 용량 조절에 큰 도움이 됩니다.
5. 가장 중요한 건 '보호자의 죄책감'을 내려놓는 일
약을 바꾸기로 결정한 게 어머님을 '잠재우려는' 게 아니에요. 어머님이 본인 안에 갇혀 더 괴롭지 않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저도 이걸 인정하기까지 오래 걸렸습니다.
마무리하며 - 어머님과 나, 그리고 가족을 위한 선택
요즘은 어머님이 거실에서 손주들 이름을 부르시며 "밥 먹었냐"고 물어보세요. 이름을 정확히 다 기억하지는 못하셔도, 그 따뜻한 말투는 분명 우리 어머님이세요.
치매는 낫는 병이 아니라는 걸 압니다. 12년을 곁에서 봐왔으니까요. 하지만 남아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우리 보호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도 함께 배웠습니다.
혹시 지금, 점점 거칠어지시는 어르신 앞에서 혼자 울고 계신 분이 있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당신 잘못이 아니고, 어머님 아버님 잘못도 아니에요. 그저 병이 그러는 것뿐이고, 그 병에 맞는 다른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요.
저는 오늘도 어머님 옆에 앉아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려드립니다. 그게 26년 며느리이자, 가족요양사인 제가 어머님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에요.
'정보와 제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5살에 시집와서 친정엄마처럼 사랑받은 며느리, 코로나 때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이유 (0) | 2026.05.12 |
|---|---|
| 시어머님의 치매검사부터 치매초기치료까지, 한집 4세대 가족이 12년을 지켜온 이야기 (2) | 2026.05.10 |